분산 데이터 처리 방식으로 탈중앙화 금융 시스템의 기틀을 다진 블록체인 기술이 이번에는 조직 구조의 탈중앙화로 주목받고 있다. 개인 및 집단의 약속이나 합의가 아닌, 프로토콜과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스마트 컨트랙트(Smart Contract)에 의해 운영되는 탈중앙화 자율조직(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 DAO)이 그것이다.

DAO 자체는 블록체인 기반 탈중앙화 생태계가 태동하면서 이미 제시된 개념이나, 최근 업계가 DAO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배경에는 DAO가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분야의 부상이 자리해 있다. P2E 게임이나 메타버스와 같이,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이용하기만 했던 개개인이 이제는 직접 서비스나 콘텐츠를 만들면서 생태계의 운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DAO는 이런 개개인의 참여를 더욱 활성화하고, 나아가 중앙조직 없이 구성원 모두가 생태계를 지탱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DAO의 기본 원리는 블록체인의 분산 데이터 처리 개념을 그대로 조직의 구성과 운영 방식에 적용한 것으로 요악할 수 있다. DAO가 구축되려면 근간이 되는 스마트 컨트랙트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는 조직 내에서 어떤 행위가 발생했을 때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지가 기록된 일종의 알고리즘 혹은 프로토콜을 의미한다.
DAO 구성원 모두가 이 스마트 컨트랙트로 약속된 시스템에 따라 조직을 운영하고, 그로 인한 이익도 구성원으로서 기여한 만큼 배분받으며, 운영에 대한 책임 역시 구성원 모두가 적절히 나눠서 부담하게 된다. 이 과정이 스마트 컨트랙트에 의해 전부 자동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DAO의 핵심 원리다.
DAO는 누구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보통 DAO는 구성원으로서의 권한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블록체인 기반의 거버넌스 토큰(governance token)을 발행하며, 이걸 암호화폐처럼 자유롭게 거래 가능하게 배포한다. 토큰을 보유하고만 있으면 DAO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거버넌스 토큰의 최초 발행과 초기 구성원에 배분 과정 역시 스마트컨트랙트에 의해 자동으로 이뤄지므로, 소위 “최초 개발자”라 불리는 스마트 컨트랙트를 만든 주체조차 이 거버넌스 토큰을 제멋대로 다룰 수 없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DAO의 운영을 위해 만들어진 스마트 컨트랙트가 모든 사람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어서다. 설령 DAO의 구성원이 아니라도 스마트 컨트랙트의 상세 내용은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알게 되어 있다. 블록체인 기반이므로 당연히 위변조 역시 불가능하다. 이런 투명성 덕분에, DAO의 구성원은 모두 DAO 운영을 위해 구축된 스마트 컨트랙트의 내용을 이해하고, DAO가 추구하는 목표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스마트 컨트랙트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DAO 구성원이 모두 공유한다. 최초 개발자조차 “처음으로 스마트 컨트랙트를 개발하여 DAO의 구축에 기여”한 것에 대해서만 구성원으로서 어떤 보상을 취하고, DAO를 원활히 운영하는데 일부 기여할 뿐, 자기 마음대로 스마트 컨트랙트를 주무를 수 없다. 애초에 최초 개발자가 스마트 컨트랙트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과하게 설정할 경우, 이 모든 내용이 노출되므로 DAO 구성원의 반발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DAO는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투표 형태로 생태계 내의 규칙이나 약속을 해결해 나간다. 거버넌스 토큰을 보유한 구성원은 원하는 의제를 제출할 권한을 얻고, 의제별로 찬반 투표나 별도의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렇게 통과된 의제는 DAO의 구성원에 의해 실행에 옮겨지고, 의결에 기여한 데 따른 보상도 스마트 컨트랙트에 의해 자동으로 배분된다. 거버넌스 토큰을 많이 가질수록, 구성원으로서 DAO에 미치는 영향도, 운영에 대한 책임도 늘어나는 식이다.
DAO의 운영 이익이나 내부 의결에 기여한 데 따른 보상은 일반적으로 거버넌스 토큰으로 지급된다. DAO 구성원으로서 더 많이 기여할수록 권한과 책임이 늘고, 이는 더 많은 기여를 유도하여, 일종의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긴 하지만, 참여에 적극적일수록 DAO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최로의 DAO로 알려진 ‘The DAO’는 일종의 탈중앙화 벤처 캐피털을 표방한 조직이었다. 투자자들은 자금을 지원한 만큼 ‘The DAO’의 구성원으로서 투자수익을 분배받을 권한이 있었고, 동시에 ‘The DAO’의 투자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의결에 참여하는 형태로 사업을 운영했다. 2016년에 최초 결성된 ‘The DAO’는 최대 기준으로 약 2.5억 달러 규모의 Ethereum(ETH)을 확보하는 등 상당한 자본금을 확보하며 주목받기도 했다.
그러나 ‘The DAO’는 아직 DAO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시기 결성된 것이라, 초기에는 구성원들조차 제대로 DAO를 운영할 능력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단순히 블록체인 혹은 암호화폐 투자 정도로 생각한 사람들이 몰렸고, 일부 집단의 해킹으로 자금 일부가 유실되는 사고까지 겪으면서 현재는 초기에 비해 작은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는 조직으로 남아 있다.
최근에는 블록체인 기반 게임과 메타버스에서 DAO를 핵심적인 운영 체계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게임은 예전부터 이용자의 게임플레이 활동이나 이용자 간 상호작용에 의해 게임 안에서 새로운 가치가 생겨나곤 했던 분야다. MMORPG에서 나름대로 경제 체제가 갖춰지거나, 캐릭터 스킨 등의 UGC를 제작하여 서로 공유하고 때로는 판매도 하는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때문에 이용자는 보다 원활한 게임플레이, 즉 게임 내 참여를 위해 업체에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데 적극적이며, 많은 게임업체들이 이런 이용자 의견을 참고하여 서비스 개선이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얻는다.
블록체인 기반 게임, 특히 2021년 주목받은 Play to Earn(P2E) 게임은 이런 이용자와 업체간 소통을 더욱 극대화하여, DAO 도입으로 아예 이용자가 게임의 운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까지 열고자 한다. P2E 게임에서 이용자는 단순히 게임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게임에 필요한 재화나 아이템 등을 스스로 생산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이 모든 과정은 미리 만들어진 스마트 컨트랙트에 의해 자동으로 이뤄지며, 이용자는 그 내용을 숙지하고 게임플레이의 형태로 게임의 운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또 이용자는 보다 효율적인 생산활동, 그리고 안정적인 경제 시스템의 구축을 목적으로 DAO 구성원으로서 의제를 제안할 수 있으며, 다수 이용자의 동의를 거치면 실제 적용으로까지 연결 가능하다. DAO에서 의결된 사항은 게임업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이용자의 발언력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다.
메타버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DAO 도입에 적극적이다. 일개 기업이나 단체가 주도하여 그들의 의도대로 만들어 놓은 공간보다는, 누구나 참여하여 서로 협력하며 만들어 가는 공간이 메타버스가 제시하는 미래상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블록체인이 메타버스에서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면서, 블록체인에서 파생한 DAO 역시 메타버스에 형성될 새로운 사회 구축의 근간 시스템으로 주목받는 분위기다.
View Point
DAO는 목적에 따라 그야말로 수많은 형태가 존재할 수 있고, 이미 다수의 DAO가 출범하여 뜻이 맞는 사람들의 구성원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탈중앙화 벤처 캐피털 ‘The DAO’에서부터, 미래 메타버스 및 Web 3.0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패션 크리에이터들이 모여 구축한 ‘Faith Tribe’, 모두를 위한 투자정보 공유 플랫폼을 표방하는 ‘Gains Associates’, 새로운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시작부터 돕자는 취지에서 결성한 ‘Paragen’, 현물 투자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Tangible’까지, 목적과 이해관계만 맞아 떨어지면 어떤 DAO든 생겨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게임 분야는 가장 적극적으로 DAO를 수용하는 영역으로 꼽힌다. 앞서 언급했듯 게임은 이미 기업과 이용자 간의 소통이 활발했기에, DAO라는 개념을 어필하고 실제 적용하는 것도 비교적 용이하다는 것이 업계의 인식이다. 대표적인 오픈월드 메타버스 게임 ‘The Sandbox’ 역시 DAO를 플랫폼 운영의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대부분의 블록체인 게임들은 어떤 형태로든 DAO를 언급하며 이용자의 직접 운영 참여를 어필하고 있다.
더 멀리 본다면 DAO는 우리가 속한 사회 그 자체까지 기술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다. 가령 메타버스는 DAO를 통해 구성원들이 각자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기술적으로 보장하고자 한다. 이는 현실에서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헌법이 보장하는 것과 사실상 같은 형태다.
다만 DAO가 정말로 문자 그대로 모두가 참여 가능한 자동화된 사회를 실현할지에 회의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DAO를 표방하는 블록체인 프로젝트 중 적지 않은 수가 실질적으로 DAO라 부르기 어렵다는 점이 우려의 근거다.
DAO 구성원으로서 권한과 책임의 무게는 거버넌스 토큰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DAO를 도입하는 프로젝트 중 상당수가 최초 개발자, 그러니까 DAO의 근간이 되는 스마트 컨트랙트를 만든 주체에게 초기 거버넌스 토큰의 발행량 상당수를 배정한다. 모두가 DAO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결국 최초 개발자가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있게 되는 셈이며, 이는 결국 주식회사에서 최대주주인 창업주에게 전권을 가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DAO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배분될 거버넌스 토큰의 분배 비율도 체크할 수 있으므로 이런 우려를 사전에 인지할 수는 있다. 실제로 해당 프로젝트의 신뢰성을 따질 때 최초 토큰의 분배 비율은 중요한 판단근거다. 진짜 문제가 되는 건 이 다음이다. DAO가 정확히 무엇이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일반 대중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그리고 암호화폐가 신흥 투자대상으로 주목받으면서 일반인의 투자 참여가 활발한 가운데, 블록체인 업계가 지나치게 DAO를 내세우며 투자를 독려하고 있다. 일반인은 그들이 부르짖는 DAO가 정말 제대로 DAO의 형태를 띠고 있는지 검증할 능력이 부족하다.
게다가 DAO는 아직 법적으로 충분히 규명된 조직 형태가 아니다. 미국에서 Dao 기반의 기업이 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사례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 국가에서는 여전히 DAO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한다. 무엇을 DAO라고 불러야 할지 공식 정의조차 모호한 상황에서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은 DAO를 내세운 스캠(scam) 프로젝트에 노출되기 쉽다.
금융 영역에서도 그러했듯, 블록체인은 DAO라는 형태로 우리가 속한 사회 마저도 탈중앙화가 가능함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수용을 가로막는 이슈가 산적한 상황에서, DAO가 또 다른 조직 형태로 인정받으려면 결국 공신력 있는 조직이나 기관의 도움이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 2021년, 미국 의회가 블록체인 전문가를 초빙한 공청회를 여는 등 각국도 블록체인 알아가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DAO가 정말 “탈중앙화 자율조직”인지를 보증해 줄 주체는, 가장 거대한 중앙집권조직인 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근거다.